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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사람, 하정우 — 두 발로 걸어온 삶의 고백

bigempty 2026. 6. 16. 00:11

걷는 사람, 하정우 — 두 발로 걸어온 삶의 고백

하정우라는 배우를 오랫동안 스크린 안에서만 바라봐 왔다.
강렬하고 묵직한 연기. 그것이 내가 아는 그였다.
그런데 에세이를 썼다는 소식에 솔직히 가볍게 생각했다.
배우가 쓴 자기 이야기가 얼마나 진솔할 수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 의심이 무너지는 데 몇 페이지가 채 걸리지 않았다.
『걷는 사람, 하정우』 에세이에는
두 발로 땅을 밟아온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문장들이 있었다.
화려한 배우의 자랑이 아니라,
걷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선 사람의 조용한 고백이었다.

출처: SBS뉴스 (링크)

배우이기 전에, 걷는 사람

하정우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배우, 영화감독, 영화제작자, 화가, 그리고 걷는 사람.

그 마지막 수식어가 사실 전부다.
그는 하루 3만 보를 걷는다.
많게는 10만 보를 넘긴 날도 있다.
강남에서 홍대까지 16,000보는 그에게 그냥 '잠깐 나가는 거리'다.
비행기를 타기 위해 강남에서 김포공항까지 8시간을 걸어간 적도 있다.

처음엔 피식 웃었다.
그런데 이내 숙연해졌다.
이것은 습관이 아니라 신앙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무명 시절에도 그는 걸었다.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던 시절,
한강 변을 따라 걷고 골목길을 누비며 자신을 다잡았다.
기쁠 때도 걸었고, 무너질 것 같을 때도 걸었다.
걷기는 그에게 몸의 운동이기 이전에,
마음의 버팀목이었다.

출처: 경향신문 (링크)

577킬로미터의 약속

2011년 백상예술대상 시상식 날,
하정우는 무심코 말을 내뱉었다.
수상하면 서울에서 해남 땅끝마을까지 걸어가겠다고.

그리고 2초 후, 그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설마 하는 마음에서 나온 공약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총 577킬로미터.
공효진을 비롯한 배우 16명과 함께 20일을 걸었다.
길 끝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담담하게 말한다.

"나는 길 위의 매 순간이 좋았고, 그 길 위에서 자주 웃었다.
길 끝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길 위에서 만난
별것 아닌 순간과 기억들이 결국 우리를 만든다."

이 문장을 읽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목적지가 아니라 여정이 사람을 만든다는 것.
그 단순한 진실이 이상하리만큼 깊이 박혔다.

 

두 발로 하는 간절한 기도

"내게 걷기란, 두 발로 하는 간절한 기도다.
나만의 호흡과 보폭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
아무리 힘들어도 끝내 나를 일으켜 계속해보는 것."

기도라는 단어를 이렇게 쓸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두 발로 걸으며 그 다짐을 쌓아간다는 것이.
그것도 오래, 조용히, 꾸준히.

그의 걷기 원칙은 단순하다.
40~50분 걷고 10분 쉬는 것을 반복한다.
이를 '교시'라 부르며, 최대 10교시까지 이어간다.
이 단순함 속에 얼마나 많은 인내가 담겨 있는지,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그리고 이런 문장도 나온다.
"단순한 행동과 결심이 훨씬 더 힘이 세다."
이것이 그가 걷기에서 배운 인생의 진리다.

내 보폭으로 살아가기

책에서 가장 오래 머문 대목이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하면서
자신이 믿고 기댈 수 있는 시간을 쌓아가는 것."

어차피 길게 갈 일이라는 믿음.
지금 힘들어도, 지금 보이지 않아도,
길게 보면 결국 시간이 내 편이 된다는 태도.
그 담담함이 묘하게도 위로가 되었다.

내 보폭을 안다는 것.
남의 속도에 흔들리지 않고,
내 걸음의 리듬을 지키며 나아가는 것.
이것이 걷기에서 배우는 가장 중요한 인생 수업이라고,
하정우는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말한다.

출처: 한국일보 (링크)

읽고 나면 걷고 싶어진다

하정우는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을 읽지 않으시더라도, 꼭 걸으셨으면 좋겠어요."

그 말이 가장 오래 남았다.
자신의 책보다 독자의 삶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
그 마음이 글 전체를 관통하고 있어서,
읽는 내내 진심이 전해졌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나는 밖으로 나갔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그냥 걸었다.
걸으면서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잡념들이
하나씩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발바닥이 땅을 밟는 감각에 집중하다 보니,
복잡했던 것들이 조금씩 단순해졌다.

이 책은 걷기에 관한 책이 아니다.
나를 잃지 않는 것에 관한 책이다.
어떤 자리에 서 있든, 어떤 속도로 살아가든,
결국 내 두 발로 내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
그 단순하고도 묵직한 진실을 전하는 책이다.

 

오늘도 나는 걸을 것이다.
30분이든 한 시간이든,
내 보폭으로, 내 속도로.
그것이 이 책이 내게 남겨준
가장 조용하고 가장 오래가는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