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라는 이름의 무게 —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유시민이 올해의 책으로 추천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솔직히 반신반의했다.
이념에 관한 이야기, 빨치산에 관한 이야기.
무거울 것 같았다.
그런데 첫 문장을 읽는 순간, 그 짐작은 산산이 부서졌다.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일색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이 한 문장에서 나는 이미 알아버렸다.
이 소설은 이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죽음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소설은 아버지의 장례식으로 시작된다.
주인공 정화는 오랫동안 연락을 끊고 지낸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3일. 그 짧은 시간 안에, 70여 년에 걸친 한국 현대사가 조용히 펼쳐진다.
아버지는 전직 빨치산이었다.
해방 이후 이념의 소용돌이 속에서 노동운동과 통일운동에 몸을 바쳤고, 여러 차례 감옥을 드나들었다.
딸 정화에게 그 삶은 짐이었다. 원망이었다. 부끄러움이었다.
그러나 장례식장에 모여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정화는 처음으로 아버지를 '이념'이 아닌 '사람'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우파 친구, 옛 동지, 연좌제로 상처받은 가족들.
저마다 다른 자리에서 아버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건네는 이야기 속에서, 아버지는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되살아난다.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냐"에서 "사람이 오죽하면 그러겠냐"로
정지아 작가는 이 소설을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냐'고 말하던 딸이, '사람이 오죽하면 그러겠냐'고 말하는 아버지를 이해하는 과정."
그 한 문장이 소설 전체를 관통한다.
나는 읽는 내내, 나 자신을 돌아보았다.
내가 판단해온 사람들이 떠올랐다.
충분히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단정 지었던 순간들이.
선입견이라는 것이 얼마나 쉽게 사람 위에 덮여 그를 가려버리는지.
정화는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서야 비로소 아버지를 만난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미처 하지 못했던, 그 만남을.
뒤늦음이 이토록 쓸쓸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소설은 조용히 일러준다.
이 소설이 유독 마음을 흔드는 이유
이 책은 정치 소설이 아니다.
이념 소설도 아니다.
다만 이런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당신의 아버지를 알고 있는가.
그가 청년이었던 시절을. 무언가를 간절히 원했던 시절을.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가 아닌, 그냥 한 사람이었던 시절을.
정지아 작가의 이름 자체가 이미 역사다.
'지'는 어머니가 빨치산 활동을 했던 지리산에서, '아'는 아버지가 몸을 숨겼던 백아산에서 한 글자씩 따왔다고 한다.
이름부터 이미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을 품고 태어난 사람.
그가 32년을 기다려 쓴 소설이다.
1990년 첫 장편 『빨치산의 딸』을 냈을 때, 그 책은 판매 금지 처분을 받았다.
작가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기까지 했다.
분노로 쓴 책이었다.
그리고 32년이 지나, 이해로 쓴 책이 나왔다.
분노가 이해가 되기까지
한 인터뷰에서 정지아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실제 윤학수라는 인물이 경로당을 찾아 아버지의 기를 살려주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순간, 뼈저린 반성을 느꼈다고.
그 감정이 이 소설의 정서를 결정지었고, 이후 원고는 물 흐르듯 써졌다고.
분노는 사람을 쓰게 만들기도 하지만, 이해는 사람을 자유롭게 만든다.
정지아는 이 소설을 통해 '빨치산의 딸'이라는 굴레에서 스스로 해방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소설 제목 '해방일지'의 진짜 의미일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해방이 아니라, 딸의 해방.
- 출간: 2022년 9월 2일, 창비
- 페이지: 268쪽
- 수상: 제19회 5·18문학상, 만해문학상
- 독자 선정: 2022년 알라딘 독자 선정 올해의 책 TOP 10
- 판매: 출간 두 달 만에 10만 부 돌파
읽고 나서 남은 것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나는 나의 아버지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가 나에게 아버지가 되기 전, 어떤 시절을 살았는지.
어떤 꿈을 품었는지. 어떤 상처를 안고 살았는지.
이름표 뒤에 가려진 그 사람을, 나는 얼마나 본 적이 있을까.
이 책은 대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질문이, 생각보다 오래 마음에 머문다.
살아 있는 동안에 만나라고.
이름 뒤에 숨은 사람을, 미루지 말고 지금 만나라고.
책은 그렇게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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