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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 정지아 첫 에세이, 술과 사람의 34가지 이야기

bigempty 2026. 8. 24. 01:39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 정지아 첫 에세이, 술과 사람의 34가지 이야기

어떤 밤이 있다. 집으로 돌아가기엔 아직 이르고, 그렇다고 계속 어딘가를 향해 걷기도 애매한 밤. 아무 말 없이 그 사람과 잔을 기울이며 그 순간을 조금 더 늘이고 싶어지는 밤. 소설가 정지아는 그런 밤을 가리켜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라고 불렀다. 2023년 9월, 그 제목 그대로의 첫 에세이집이 세상에 나왔다.

조니워커 블랙 라벨 위스키 병 — 책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위스키
출처: Unsplash (링크)

《아버지의 해방일지》 작가의 또 다른 얼굴

정지아는 2022년 장편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로 수많은 독자를 울리고 웃긴 작가다. 1965년생으로,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0년 《빨치산의 딸》을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199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고욤나무〉가 당선되어 정식 등단했다. 이효석문학상, 한무숙문학상 등을 수상한 묵직한 소설가인 그가, 이번에는 가장 솔직하고 유쾌한 얼굴로 독자 앞에 섰다. 바로 술 이야기다.

애주가로 소문난 작가가 평생에 걸쳐 만났던 술과 사람에 관한 이야기, 총 34편의 에세이가 이 책 한 권에 담겨 있다. 위스키, 소주, 막걸리, 사케를 가리지 않고, 장소도 구례 골목, 몽골 초원, 오사카 술집, 키르기스스탄 모닥불 옆, 블라디보스토크 항구까지 세계 곳곳을 넘나든다.

책의 구성과 주요 에세이

  • 1부 — 「첫 술은 아빠」, 「시바스와 변절」, 「우리들의 축제의 밤」, 「오병이어의 기적 — 남원 역전 막걸리」
  • 2부 — 「천천히 오래오래 가만히」, 「블루디 블루디」, 「타락의 맛 — 맥켈란 1926」
  • 3부 — 「초원의 모닥불이 사위어 갈 때」, 「춤바람 고백기 — 추억의 제이제이」
  • 4부 — 「어느 여름날의 천국」, 「관계의 유통기한」
형형색색의 술병들이 늘어선 바 선반
출처: Unsplash (링크)

술이 지우는 것들 — 신분, 한계, 그리고 거리

책의 핵심은 술 그 자체가 아니다. 술이라는 매개체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높고 단단한 벽을 어떻게 허물어뜨리는가에 있다. 사회주의자 아버지로부터 처음 술의 세계를 접했던 달콤하고도 씁쓸한 기억, 수배자 신분으로 지리산에 몰래 올라 마셨던 위스키의 아찔한 추억, 북한 방문 중 보위부 간부와 테이블 위에서 벌인 위스키 대결의 역설적인 장면까지 — 작가의 술자리에는 언제나 시대와 사회가 녹아 있다.

"술은 스트레스를 지우고 신분을 지우고 저 자신의 한계도 지워 우리를 해방시킨다."

— 정지아,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작가가 즐겨 마시는 조니워커 블루, 시바스리갈 같은 위스키는 단순한 기호품이 아니다. 패스포트, 캡틴큐 같은 시대의 술들과 함께, 각각의 이름은 어느 사람과의 어느 밤을 통째로 불러낸다. 책의 한 문장이 마음을 잡아챈다.

"천천히 오래오래 가만히 마시면 누구나 느끼게 된다.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한 연민을…"

— 정지아,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라는 말의 의미

작가는 이 표현을 거창하게 정의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성취했거나, 반대로 크게 좌절했거나, 혹은 지금 이 분위기와 사람을 조금 더 오래, 천천히 붙잡아 두고 싶을 때 — 그것이 바로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다. 술이 없어도 우리는 살 수 있지만, 술이 함께일 때 생겨나는 그 미묘한 차이가 어떤 관계를 돌이킬 수 없이 가깝게 만든다는 것을 작가는 유쾌하게, 그리고 진심을 다해 증명해 보인다.

얼음이 든 투명한 위스키 글라스, 밤의 감성
출처: Unsplash (링크)

책 기본 정보

저자 정지아
출판사 마이디어북스
출간일 2023년 9월 7일
쪽수 320쪽
정가 17,000원
장르 한국 에세이 / 문인 에세이

이 책을 권하는 이유

정지아의 문장은 소설처럼 단단하고, 대화처럼 솔직하다. 술 이야기를 하지만 알코올 도수나 페어링 같은 정보를 늘어놓지 않는다. 대신 그 술을 나눈 사람의 눈빛과, 그날 밤의 공기와, 이야기가 끝난 뒤의 여운을 쓴다. 책장을 덮을 즈음, 독자는 자신에게도 그런 밤이 있었음을 조용히 떠올리게 된다. 거창한 계기가 없어도 좋다. 오늘 밤 누군가와 조용히 한 잔 기울이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면 — 그것으로 충분하다.

마지막 한 잔처럼

책을 다 읽고 나면 술이 당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문득 오래된 친구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정지아가 바란 것이 아닐까 싶다. 잔을 들기 전의 그 설레는 순간처럼, 이 책은 읽기 전부터 이미 어딘가 달콤하다.